2025년 1월 매일성경묵상 본문 - 여호수아를 어떻게 묵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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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현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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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어떻게 묵상할 것인가
지속적인 순종이 필요하다.
1. 들어가는 말
전쟁의 시대다. 우리는 폭력과 갈등, 분열과 대립이 일상이 된 현실을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경의 전쟁 이야기를 어떻게 묵상해야 할지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이 주된 배경이기 때문에 성찰과 분별 있는 묵상이 더욱 중요하다.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해나가는 이야기가 현대의 '인종청소'나 '대량 학살'을 연상시킬 수 있고, 자칫 잘못하면 현대의 전쟁과 폭력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을 진멸한 것이 가나안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참조, 창 15:16; 히 11:31). 따라서 가나안 정복 전쟁을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죄와 세상의 악과 싸우는 영적 전투에 대한 비유로 묵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적 전투'를 삶에서 실천하려면 다시금 현실에서 어떤 태도가 기독교적인지를 성찰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나안 '전쟁'이 필요했다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느 정도의 '폭력'과 '대결'은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가나안 정복 전쟁과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십자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전쟁을 통해 땅을 기업으로 받았던 여호수아의 이야기와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마 5:5)는 예수님의 팔복 이야기는 서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전쟁과 폭력이라는 현실의 주제와 더불어 여호수아서를 묵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주제는 지속적인 순종의 중요성이다.
여호수아서는 모세오경 다음에 나오는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이다. 이 역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야기 (여호수아)로 시작해,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 때문에 심판을 받아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포로로 끌려가는 이야기 (열왕기하)로 마친다.
여호수아서가 더 큰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은 여호수아의 전반적인 메시지를 포착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여호수아서는 여리고성 전투에서 거둔 승환호성으로만 가득 찬 책이 결코 리의 아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우리는 세겜에서 있었던 언약 갱신의 엄숙한 음성을 함께 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여호수아서를 묵상할 때 여호수아서가 24장까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 본문이 주는 강렬함 때문에 전체의 메시지를 놓치기 쉽다. 여리고 정복으로 대표되는 가나안 정복 이야기에만 과도한 관심을 쏟으면 여호수 아서를 '승리의 책'으로만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세겜의 언약 갱신으로 끝나는 여호수아서는 '순종의 책'이다.
2. 구조
1) 가나안 땅의 정복 준비 (1:1-5:12)
1장: 여호수아의 소명과 격려
2장: 라합과 정탐꾼 이야기
3-4장. 요단강을 건너가나안 땅에 들어감
5:1-12: 길갈에서의 할례와 유월절
2)가나안 땅 정복(5:13-12:24)
5:13-6:27:여리고성 함락
7-8장: 아이성에서의 패배와 회복
9장: 기브온 사람들과의 언약
10장. 남부 지역 정복
11장: 북부 지역 정복
12장: 모세와 여호수아가 정복한 왕들의 목록
3) 땅의 분배(13-21장)
13-17장: 요단 동편과 서편의 땅 분배
18-19장: 미분배 지역의 분배
20장: 도피성 설정
21장: 레위 지파의 성읍 배정
4) 아름다운 땅에 남으려면 (22-24장)
22장: 요단 동편지파의 귀환과 오해 해결
23장: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
24장: 세겜에서의 언약 갱신과 여호수아의 죽음
3. 주요 내용과 메시지
1)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은혜
여호수아서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만 편애하는 이야기로 오해할 수 있다. 가나안 정복 전쟁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여호수아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이것은 라합이 하나님 백성이 되는 2장부터 확인된다. 가나안 기생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참조.마21:31)!
라합과 아간의 대조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종, 성별, 신분과 같은 외적 조건에 따른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한결 더 명확히 한다. 기생인 가나안 여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2장과 달리 7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핵심 지파인 유다 족속의 한 남자가 가나안처럼 '헤렘'(온전히 바친 것)된다.
아간은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 즉 가족과 소유물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7:24,25). 이것은 라합이 자신에게 속한 모든 이와 함께 구원받은 것과 대조된다(6:23-25). 우리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라합이 이스라엘처럼 되며 이스라엘 사람인 아간이 가나안 민족처럼 되는 대조를 본다. 이 대조가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라합의 이야기로 시작된 여호수아서는 아간의 범죄를 거쳐 기브온 주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9장). 물론 기브온 주민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는 과정은 온전하지 않았다. 가나안 사람인 그들이 언약관계로 들어오는 과정에 '거짓'이라는 요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생명을 구하여 진멸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기브온 사람들은 비록 나무 패고 물 긷는 종의 신분일지라도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경계가 없다.
2)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정의롭고 공평하시다는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평탄한 길을 약속하시면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도리가 담긴 율법책을 묵상하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요청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할 때만 가능하다.
만일 이스라엘이 언약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은 껍질만 남는다. 아이성의 패배 이야기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요단강을 건넌 후 첫 성인 여리고에서 승리한 다음, 이스라엘은 아이성에서 패배한다. 그 이야기를 담은 7장의 주요 논지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패한 이유가 1절, 11-12절에 설명된다. 그들이 죄를 짓고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 설명에는 매우 흥미로운 표현이 나온다. 1절과 11절의 '온전히 바친 물건'과 12절의 '온전히 바친 것'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헤렘'인데, 이 단어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멸하다'라는 동사와 어근이 같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할 '헤렘'을 이스라엘이 가져가 자기 가운데 둠으로 언약이 파기되고 이스라엘 또한 가나안 민족처럼 진멸되어야 할 '온전히 바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범죄한 사람을 추적해가는 과정 (7:14-18)에서도 이스라엘은 가나안처럼 취급된다. 본문에 '뽑히다'라고 번역한 동사는 일반적으로 제비뽑기를 묘사하는 동사가 아니라 보통 '점령당하다'라고 번역되는 군사적인 함의를 지닌 동사다. 이 동사는 특히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의 여러 성읍을 점령했다는 진술에 반복적으로 쓰인다(10:32,37,39;28,35절의 '취하고'도 같은 동사). 즉 범죄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이 마치 한 단계한 단계 가나안 성읍을 점령해가는 과정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민족이 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렇게 이스라엘 내부에 감추어진 가나안적 요소와 관련하여 아간의 이름은 매우 흥미롭다. '아간'이라는 이름을 이루는 히브리어 자음들은 '가나안'을 만드는 자음들과 같다(한글로 말하자면 두 단어 모두 ㄱ, ㄴ, ㅇ으로 이뤄졌다). '아간이라는 이름 자체에 가나안적 요소가 감추어져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진정한 '가나안'은 그들 가운데 있었다. 이스라엘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의 불순종을 경계해야 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가나안처럼 다루셨다.
3) 인간의 전쟁과 폭력,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여리고와 아이성 정복에 관한 이야기는 기브온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지나 가나안 남부와 북부 정복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호수아서는 표면적으로 전쟁의 책으로 보인다. 구약 전체에서 '칼날'이라는 표현이 서른다섯 번 나오는데, 열세 번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책이 여호수아서다. 칼날'에 나오는 것을 포함해 '칼'이라는 표현은 스무 번 나온다. 칼은 그야말로 전쟁 도구다. 전쟁은 여호수아서의 주된 소재이고 우리는 이 안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부분 승리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런데 여호수아서를 '전쟁의 책'이라고만 요약하면 고민이 생긴다. '전쟁을 명령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전쟁을 명령하시는가?" 만일 여호수아서의 기록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생각일 뿐 실제 하나님의 행동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 아니라면 고민은 그리 깊지 않다. 하나님은 전쟁을 명령하신 적이 없고, 지금도 명령하지 않으신다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만일 여호수아서의 기록이 하나님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보는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하나님이 과거에 전쟁을 명령하셨듯이 지금도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늘 언제나 옳지 않은가?
그렇다면 만일 누군가 과거 이스라엘처럼 지금 자신에게 하나님이 전쟁을 명령하셨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만일 누군가 자신의 '폭력'적이고 '무례한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주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실제로 미국에서는 반(反) 낙태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낙태 시술자들을 살해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신의 살인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다고 생각하며 받을 처벌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나안 전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모두가 완벽하게 만족할 만한 답을 내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씨름하며 묵상하는 데 도움을 줄 세 가지 틀에 대한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설명은 (결론이나 답이 아니더라도) 좋은 묵상의 토대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첫째, 가나안 정복 전쟁은 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 사건이지만, 구약성경 전체의 다른 사건들과 비교했을 때 보편적이거나 규범적인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라이트는 가나안 정복과 출애굽을 대조한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중심적인 사건으로, 포로 생돌아오는 사건이나 예수님의 십활에서 자가 사건도 '출애굽'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정도로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 전쟁은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독특하고 제한된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둘째, 라이트는 하나님의 주권적 정의 개념을 제시한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폭력성뿐 아니라 편파성에 대해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라이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히 편들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이 혈통적 이유로 가나안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대우받지 않았으며,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보였을 때 동일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며 들어간 이스라엘은 열왕기에서 가나안 사람들과 같은 죄를 저지르고 동일한 운명에 처해 쫓겨난다.
셋째, 라이트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궁극적 목표가 전쟁이 아닌 평화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특정 시기에 전쟁을 통해 역사하셨지만, 궁극적으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루는 이상을 추구하셨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큰 틀에서 보면, 가나안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부수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체를 고려할 때, 전쟁은 일시적이며 제한된 사건이다.
여호수아서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 방법'은 전쟁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팔복에서 '온유함'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복'이라고 이야기하신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개념은 동일한데 그 방법은 '전쟁'과 '온유함'이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 대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온유함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권리나 힘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면, 예수님의 온유함은 십자가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으며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 방식과 관련해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선언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십자가 이전에는 죄악의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이 심판을 받았지만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 죄악의 심판을 스스로 감당하셨다고 설명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세상의 죄를 다루시는 방식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구약의 폭력, 특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는 '폭력'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의 특성을 알려주는 가장 온전하고 최종적인 계시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희생을 통해 죄악을 심판하시며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빛 아래서 가나안 전쟁을 묵상해야 한다.
4) 선물인 땅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땅을 각 지파에게 '기업'으로 나누어준 이야기를 기록한다. 개역개정에서 '기업'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나할라'는 여호수아서에 자주 나오는 중요한 단어 중 하나다(13:6-8,14,15,23,24,28,29,32,33). 이 단어는 "정당한 몫이나 받을 권리에 해당하는 것이면 무엇에든지 사용되며, "법적으로 그리고 고유하게 한 사람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땅을 나누어주는 맥락에서는 '소유지'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이스라엘을 구성하던 각 지파와 가문들에 땅을 나할라'로 나누어주었다는 것게그 땅이 그들의 정당한 소유가 되었은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성하던 열두지파 중 하나인 레위 지파에게는 그러한 정당한 소유지가 주어지지 않았다(13:33). 하지만 그들도 생활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땅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각 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 지파에게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성읍과 목초지를 제공했다(21:1-3).
주목할 것은 레위지파가 정당한 소유로 받은 땅은 없었지만 거주와 생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일정한 땅의 사용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지파들은 그 성읍과 목초지가 자신들의 정당한 소유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그 사용권을 레위 자손들에게 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땅의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를 발견한다. 이러한 소유권과 사용권의 분리는 인류에게 주어진 자원에 대해 “모든 사람이 사용할 권한은 어떤 사람이 소유할 권한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실이 가능한 이유는 '땅'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주어진 어떤 것이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은 구약의 땅을 넘어 그리스도인들(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소유 재산의 특징이기도 하다.
5) 지속적인 순종
여호수아서가 끝날 즈음에 여호수아는 언약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 모두 실현되었음을 확인한다(23:14). 그런데 문제는 '모든 선한 말씀'이 다 실현된 것같이, 불순종하면 멸망한다는 '모든 불길한 말씀도 이스라엘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할 때까지 실현된다는 사실이다(23:15).
이어지는 16절도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한다는 주제를 다시 반복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근거는 가나안 땅을 약속받은 아브라함과의 혈연성이 아니라, 언약을 지키는 순종의 삶이다. 이렇게 순종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여호수아서를 살펴보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을 강조하고 있음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다(1:7-9; 23-24장).
23장의 마지막 말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범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가나안 땅에서 속히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23:11,16).
24장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장면에서도 여호수아는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재차도전하여, 마침내 백성에게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라는 결단을 받아낸다(24:24).
여호수아서가 승리의 책이기보다 순종의 책이라는 것은 1장부터 24장까지 모든 본문을 균형 있게 묵상할 때 더욱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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